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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침묵의 집, 그리고 한 줄기 빛"

by 있유노마드 2025. 10. 31.

웹소설 "침묵의 집, 그리고 한 줄기 빛 " : 오빠들이 무서워요" 침묵 속에 갇혔던 13살 소녀가 목소리를 되찾기까지

 

 

1장 : 침묵 속의 집

서울 변두리, 낡은 아파트 단지였습니다. 페인트가 벗겨진 외벽, 녹슨 난간, 복도마다 쌓인 먼지가 시간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지요. 4층 402호 현관문 앞에서 김지윤은 가방 끈을 꽉 쥐었습니다. 열세 살 소녀의 손은 차갑게 떨렸습니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오래된 장판과 곰팡이, 그리고 며칠째 환기하지 않은 답답한 공기였지요. 지윤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습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거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이번 주도 출장 중이었지요. 지윤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시계를 확인했습니다. 오후 네 시 삼십 분. 오빠들이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습니다.

이 시간만큼은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지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잠금장치는 없었지요. 태현 오빠가 떼어냈으니까요. "동생이 형들한테 문 잠글 이유가 뭐 있냐"는 말과 함께였습니다. 지윤은 그날 이후 문고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방 안은 좁았습니다. 싱글 침대 하나, 작은 책상 하나, 낡은 옷장 하나가 전부였지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희미했습니다. 맞은편 건물이 가로막고 있었으니까요. 지윤은 책상 앞에 앉아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습니다.

수학 숙제였습니다. 하지만 연필을 든 손은 움직이지 않았지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오늘은 괜찮을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지윤의 등이 굳었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발소리는 지나갔습니다. 옆집이었습니다. 지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습니다.

***

김지윤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현수는 건설 회사 현장 감독이었고, 어머니 박미숙은 전업주부였지요. 세 명의 오빠가 있었습니다. 큰오빠 태현은 스물한 살, 둘째 도현은 열아홉 살, 셋째 상현은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어릴 적 지윤은 웃음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은 "지윤이는 참 밝고 씩씩하네요"라고 말했지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을 뛰어다녔고, 집에 와서는 오빠들에게 학교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곤 했습니다.

변화는 서서히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출장이 잦아졌습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집을 비웠지요. 어머니는 생계를 보태기 위해 식당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집안은 점점 적막해졌습니다.

태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성적도 형편도 따라주지 않았지요.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저녁 지친 얼굴로 돌아왔고,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화가 늘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였을까요. 태현이 지윤을 부르는 목소리가 달라졌습니다.

야, 지윤아. 물 좀 갖다 줘.

명령이었습니다. 부탁이 아니었지요. 지윤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태현은 혀를 찼습니다. "이것도 못하냐."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도현과 상현도 형을 따라했습니다. 지윤에게 심부름을 시켰고, 말을 듣지 않으면 째려봤지요. 지윤은 처음엔 그저 오빠들이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더 잘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태현의 손은 점점 거칠어졌습니다.

***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습니다. 태현이었지요. 술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지윤은 거실 소파에서 몸을 움츠렸습니다. 태현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지윤을 쳐다봤습니다.

엄마는?

아직 안 오셨어.

지윤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태현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지요.

밥은?

냉장고에 반찬 있어. 내가 차려줄게.

지윤은 서둘러 일어났습니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지요. 손이 떨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태현이 소리쳤습니다.

조용히 못 해?!

지윤은 움찔했습니다. 더 조심스럽게 반찬을 꺼냈지요. 밥을 데우고, 국을 끓이고, 상을 차렸습니다. 태현은 묵묵히 먹었습니다.

그때 도현과 상현이 돌아왔습니다. 학원이 끝난 시간이었지요. 두 사람도 식탁에 앉았습니다. 지윤은 부엌 한쪽에서 그들을 바라봤습니다.

너는 안 먹냐?

도현이 물었습니다. 지윤은 고개를 저었지요.

배 안 고파.

거짓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앉고 싶지 않았습니다. 태현의 눈빛이 무서웠고, 도현과 상현의 침묵도 두려웠으니까요.

저녁을 마친 뒤, 태현이 지윤을 불렀습니다.

야, 설거지 해.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릇을 닦다가 실수로 물이 튀었습니다. 태현의 옷에 몇 방울 묻었습니다.

순간, 태현의 손이 지윤의 팔을 움켜잡았습니다.

똑바로 못 해?

미안해, 오빠. 실수였어.

실수? 맨날 실수야?

태현의 목소리는 차가웠습니다. 손에 힘이 들어갔지요. 지윤은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태현은 지윤을 밀쳤습니다. 지윤은 싱크대에 부딪혔고, 등이 욱신거렸습니다.

다음엔 조심해.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도현과 상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지윤은 설거지를 마쳤습니다. 등은 여전히 아팠지만,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요. 어둠 속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울었습니다.

내가 잘못했어.'

지윤은 자신을 탓했습니다. 더 조심했어야 했다고, 더 잘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지요. 오빠들이 화내는 건 자신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갔습니다.

복도를 걷는 지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지윤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지요. 교실 뒤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하늘은 흐렸습니다.

쉬는 시간, 친구 수아가 다가왔습니다.

지윤아, 어제 연락했는데 왜 답장 안 했어?

미안, 못 봤어.

요즘 너 좀 이상해. 무슨 일 있어?

지윤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괜찮아.

수아는 더 묻지 않았습니다. 지윤의 표정이 말을 막았으니까요. 수아는 돌아섰고, 지윤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에도 지윤은 구석에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그 속에 섞이고 싶지 않았지요.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방과 후, 지윤은 천천히 집으로 향했습니다.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습니다. 현관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지요. 그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거실은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지윤은 알았습니다. 이 고요는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오빠들이 돌아오면, 또다시 그 시간이 시작될 거라는 걸.

지윤은 방문을 닫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공책을 펼쳤지만, 글씨는 흐릿하게 보였지요. 눈물이 고였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질문은 떠올랐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지윤은 그저 침묵 속에 머물렀습니다. 이 집에서, 이 고립 속에서, 혼자 견디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몰랐으니까요.

창밖으로 해가 기울었습니다.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2장 : 눈물 속의 고립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지윤의 팔에는 멍이 생겼지요. 태현이 어제 저녁, 설거지가 늦었다며 팔을 비틀었습니다. 지윤은 긴 팔 옷으로 그 흔적을 가렸습니다.

거울 앞에 선 지윤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창백했습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자리 잡았지요. 매일 밤 잠들기 전 울었으니까요. 지윤은 머리를 빗으며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실수하지 말자.'

***

학교 복도는 시끄러웠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떠드는 소리, 뛰어가는 발소리가 뒤섞였지요. 지윤은 그 사이를 조용히 걸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자 수아가 손을 흔들었습니다.

지윤아! 여기!

지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갔습니다. 수아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지요.

주말에 우리 쇼핑몰 갈 건데, 너도 갈래?

지윤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가고 싶었습니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요. 하지만 집 생각이 머리를 채웠습니다. 오빠들이 싫어할 것 같았습니다. 특히 태현이요.

미안, 나는 못 갈 것 같아.

왜? 또 바빠?

응,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수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지요. 지윤은 자리에 앉으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거절하는 게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자 태현과 도현이 거실에 있었습니다. 둘은 TV를 보고 있었지요. 지윤은 조용히 신발을 벗으며 인사했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태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도현이 말했지요.

밥 차려.

네.

지윤은 부엌으로 갔습니다. 냉장고를 열고 반찬을 꺼냈지요. 어머니가 새벽에 만들어둔 것들이었습니다. 지윤은 빠르게 상을 차렸습니다. 실수하지 않으려 조심했지요.

식사 중, 태현이 입을 열었습니다.

야, 지윤아.

응?

네 방 청소 좀 해라. 지저분하던데.

알았어.

그리고 빨래도 해놔. 내일 아침까지.

지윤은 젓가락을 든 채 멈칫했습니다. 숙제도 해야 했고, 시험 공부도 해야 했지요. 하지만 말할 수 없었습니다. 태현의 눈빛이 차가웠으니까요.

네, 오빠.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 뒤 빨래를 돌렸지요.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였습니다. 지윤은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습니다. 공책을 펼쳤지만, 눈이 스르르 감겼습니다. 너무 피곤했습니다.

그때 문이 열렸습니다. 상현이었지요.

야, 지윤아.

왜?

형이 물 좀 갖다 달래.

지윤은 한숨을 삼켰습니다.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 물을 따라 거실로 가져갔지요. 태현은 받아 마시며 말했습니다.

찬물은 왜 가져와. 미지근한 걸로.

...알았어.

지윤은 다시 부엌으로 갔습니다. 물을 데워 가져왔지요. 태현은 이번엔 아무 말 없이 마셨습니다. 지윤은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책상 위의 공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숙제는 반도 하지 못했지요. 지윤은 연필을 들었지만, 손이 떨렸습니다.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질문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

며칠 뒤, 담임 선생님이 지윤을 교무실로 불렀습니다. 이수진 선생님이었지요. 선생님은 따뜻한 눈빛으로 지윤을 바라봤습니다.

지윤아,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니?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선생님. 괜찮아요.

숙제도 자주 안 해오고, 수업 시간에 집중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돼서 그래.

선생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습니다. 지윤은 가슴이 먹먹해졌지요. 누군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게 낯설었습니다.

죄송해요, 선생님. 앞으로 잘할게요.

지윤아, 선생님이 하는 말은 혼내려는 게 아니야. 네가 힘든 게 있으면 얘기해도 돼.

지윤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말하고 싶었습니다.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오빠들의 태도를,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요.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말하면 어떻게 되지?'

태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화난 표정, 차가운 목소리, 거친 손이 생각났지요. 지윤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정말 괜찮아요.

이수진 선생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윤이 마음의 문을 닫은 게 느껴졌지요.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래, 알겠어. 하지만 언제든 얘기하고 싶으면 선생님한테 와. 알았지?

네, 선생님.

지윤은 교무실을 나왔습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요. 하지만 참았습니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봤습니다. 눈이 빨개져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어.'

지윤은 자신에게 다짐했습니다. 말하면 더 나쁜 일이 생길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

주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잠깐 집에 왔지요. 지윤은 거실에서 아버지와 마주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피곤한 얼굴이었습니다.

지윤아, 학교는 잘 다니지?

네, 아빠.

오빠들이랑 사이는 괜찮고?

지윤은 잠시 멈칫했습니다. 아버지는 눈치채지 못했지요. 지윤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네, 괜찮아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오빠들 말 잘 듣고. 아빠가 자주 집에 없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아빠.

아버지는 다시 출장을 떠났습니다. 지윤은 현관문을 닫으며 생각했지요. 아버지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걸. 아버지는 너무 바빴고, 지친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날 밤, 태현이 늦게 들어왔습니다. 술을 마신 것 같았지요. 지윤은 방에서 문소리를 들었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습니다.

태현이 지윤의 방문을 열었습니다.

야, 자냐?

아니, 안 잤어.

뭐 하냐?

숙제하고 있어.

태현은 방 안을 둘러봤습니다. 어지럽지 않았지요. 하지만 태현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청소 똑바로 해라. 먼지 날리잖아.

알았어, 오빠.

태현은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지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요.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습니다.

***

월요일 아침, 지윤은 거울 앞에 섰습니다. 얼굴은 더 창백해졌고, 눈빛은 흐려져 있었지요. 지윤은 자신에게 속삭였습니다.

조금만 더 참자. 내가 더 잘하면 괜찮아질 거야.'

학교에 갔습니다. 복도에서 수아가 다가왔지요.

지윤아, 너 요즘 정말 이상해.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지윤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정말?

응, 정말이야.

수아는 더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지요. 지윤은 교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하늘은 흐렸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질문은 떠올랐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습니다. 지윤은 그저 책상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눈물이 흘렀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점심시간, 지윤은 화장실 칸막이에 앉아 조용히 울었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혼자서요. 그렇게 견디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몰랐으니까요.

방과 후, 지윤은 천천히 집으로 향했습니다. 발걸음은 더 무거웠지요.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집은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지윤은 알았습니다. 이 고요는 거짓이라는 걸. 곧 오빠들이 돌아오면, 또다시 두려움이 시작될 거라는 걸.

지윤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책상에 앉아 공책을 펼쳤지요. 하지만 글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흐려놓았으니까요.

누군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지윤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다는 걸,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지요. 하지만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왔습니다. 지윤은 그 어둠 속에서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3장 : 작은 빛, 이수진 선생님

지윤의 손목에 새로운 멍이 생겼습니다. 어젯밤 일이었지요. 태현이 지윤의 손목을 잡아끌며 말했습니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설거지는 바로바로 하라고.

오빠, 아파.

아프면 제대로 해.

도현과 상현은 옆에서 지켜만 봤습니다. 말리지 않았지요. 지윤은 손목을 감싸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거울을 보니 붉은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이번엔 숨기기 어려웠습니다.

***

학교 복도는 여느 때처럼 시끄러웠습니다. 지윤은 긴 팔 카디건을 입고 교실로 들어갔지요. 손목을 감추려 애썼습니다.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꺼냈습니다.

체육 시간이었습니다. 운동장에서 피구를 했지요. 지윤은 공을 피하다가 카디건이 벗겨졌습니다. 손목의 멍이 드러났습니다.

수아가 달려왔습니다.

지윤아, 그거 어떻게 된 거야?

아, 이거? 문에 부딪혀서.

문에? 이렇게 손목이?

지윤은 재빨리 카디건을 입었습니다. 수아의 눈빛이 의심스러웠지요. 하지만 더 묻지 않았습니다. 지윤은 안도하면서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들키면 안 돼.'

***

방과 후, 담임 이수진 선생님이 지윤을 불렀습니다. 교무실이 아니라 상담실이었지요. 작고 조용한 공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의자를 권하며 앉았습니다.

지윤아, 오늘 체육 시간에 손목에 멍 든 거 봤어.

지윤은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지요.

선생님한테 솔직하게 얘기해줄 수 있을까? 집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지윤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입술을 깨물었지요.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태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태현의 경고가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집 일을 밖에 떠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지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그냥 제가 부주의해서...

지윤아.

선생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습니다.

선생님은 네 편이야. 무슨 일이든 말해도 괜찮아. 네가 힘들어하는 게 보여서 걱정돼.

지윤은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었지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선생님...

응, 천천히 말해봐.

오빠들이... 저한테...

지윤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목이 메었지요. 선생님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지윤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저한테 심부름을 시키고, 제가 못하면 화내요. 가끔... 때리기도 하고...

오빠들이 그랬구나.

네... 그런데 선생님,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오빠들이 알면...

지윤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선생님은 지윤의 손을 가만히 잡았지요.

지윤아,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절대로.

하지만 제가 더 잘했으면...

아니야. 누구도 너를 때릴 권리는 없어. 가족이라도 마찬가지야.

선생님의 말은 단호했습니다. 지윤은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걸 느꼈지요.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왔습니다.

선생님, 제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지윤아, 선생님은 너를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이런 일은 혼자 해결할 수 없어.

안 돼요. 오빠들이 알면 더 심해질 거예요.

선생님은 잠시 고민했습니다. 지윤의 두려움을 이해했지요. 하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알았어. 그럼 우선 선생님이랑만 얘기하자.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선생님은 휴대폰 번호를 적어 건넸지요.

언제든 힘들면 선생님한테 연락해. 알았지?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윤은 상담실을 나왔습니다. 가슴이 복잡했지요. 누군가에게 말했다는 안도감과, 들켰다는 두려움이 뒤섞였습니다.

***

집으로 가는 길은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지윤은 심호흡을 했지요. 문을 열었습니다.

거실에 태현이 앉아 있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지윤은 조용히 인사했지요.

다녀왔습니다.

태현은 고개를 돌렸습니다. 표정이 평소보다 어두웠지요.

야, 지윤아. 이리 와봐.

지윤은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천천히 다가갔지요. 태현이 물었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없었어요.

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냐고.

지윤은 얼어붙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태현은 냉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네 짝꿍 어머니가 우리 엄마 아는 사람이더라. 선생님이 너 상담한다고 하더라는데?

지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태현이 일어났지요.

뭐라고 했어. 말해봐.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숙제 얘기했어요.

거짓말하지 마.

태현의 목소리는 낮고 차갑했습니다. 지윤은 뒤로 물러섰지요. 태현이 한 걸음 다가왔습니다.

집 일을 밖에 떠벌리고 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말했잖아.

아무 말 안 했어요. 정말이에요.

지윤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태현은 지윤을 노려봤지요.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태현은 돌아섰습니다.

다음엔 조심해.

태현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지윤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떨었지요.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

밤이 되었습니다. 지윤은 방에 혼자 앉아 있었지요. 선생님이 준 휴대폰 번호를 꺼내 봤습니다. 전화를 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지요.

전화하면 어떻게 될까.'

선생님은 도와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태현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더 화를 낼 것 같았습니다. 지윤은 휴대폰을 내려놓았습니다.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없었지요. 먹구름만 가득했습니다. 지윤은 무릎을 끌어안았습니다.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걸까.'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는 혼자 견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가 느껴졌지요. 선생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지윤은 그 말을 곱씹었습니다. 정말 자신의 잘못이 아닐까요. 오빠들이 화내는 건 자신이 부족해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선생님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단호하게 말했지요. 지윤은 그 목소리를 기억했습니다.

문득 결심이 섰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줘보자.'

선생님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지요. 지윤은 휴대폰 번호를 다시 꺼냈습니다. 아직 전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손에 꼭 쥐고 있었지요.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갔습니다. 복도에서 이수진 선생님과 마주쳤지요. 선생님은 지윤을 보며 미소 지었습니다.

지윤아, 잘 잤어?

네, 선생님.

힘들면 언제든 얘기해.

네.

지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은 따뜻했지요. 지윤은 그 순간 느꼈습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교실로 들어가며 지윤은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있어.'

작은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윤에게는 큰 의미였지요. 지금까지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으니까요.

창밖으로 햇살이 조금씩 비쳤습니다. 먹구름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지요. 지윤은 그 빛을 바라보며 다짐했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자. 그리고 용기를 내자.'

아직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지요. 선생님이라는 작은 빛이 생겼습니다.

지윤은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숙제를 시작했지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썼습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듯이요.

복도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지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자신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요.

웃을 수 있겠지.'

지윤은 스스로에게 대답했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요. 그 언젠가를 위해 지금 견디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작은 빛을 따라가기로 했지요.







4장 : 진실의 문

이수진 선생님은 주말 내내 고민했습니다. 지윤의 얼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지요. 월요일 아침, 선생님은 학교 상담실에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학생 한 명이 가정에서 학대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담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가요?

손목과 팔에 멍이 있고, 정서적으로 매우 위축되어 있습니다. 본인은 오빠들에게 맞는다고 했습니다.

학생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선생님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지윤이 부탁했지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요. 하지만 선생님은 알았습니다.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걸.

김지윤입니다. 열세 살이고요...

선생님은 필요한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상담원이 말했지요.

경찰과 함께 가정 방문을 진행하겠습니다. 학생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선생님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가슴이 무거웠지요. 지윤이 선생님을 원망할까요. 하지만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

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김지윤의 집 초인종이 울렸지요. 어머니 박미숙이 문을 열었습니다. 경찰관 박경수와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이 서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되어 방문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아동학대요? 무슨 말씀이세요?

김지윤 학생이 계신가요?

네, 있는데... 무슨 일이신지...

경찰관은 정중하게 말했지요.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학생과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습니다. 거실로 안내했지요. 태현과 도현, 상현이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세 오빠는 긴장한 표정이었습니다.

지윤은 방에서 나왔습니다. 경찰관을 보고 얼어붙었지요. 선생님이 신고한 걸까요. 지윤은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지윤아, 우리 잠깐 얘기할까?

상담원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지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상담원과 경찰관이 따라왔습니다.

지윤아, 학교 선생님이 걱정해서 연락했어. 집에서 힘든 일이 있었니?

지윤은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말하고 싶었지만, 태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지요. 하지만 상담원의 눈빛은 따뜻했습니다.

괜찮아. 천천히 말해도 돼.

지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했습니다.

오빠들이... 저한테 심부름을 많이 시켜요. 못하면 화내고, 가끔 때려요.

언제부터 그랬어?

몇 달 전부터요. 처음엔 그냥 화내는 정도였는데, 점점 심해졌어요.

상담원은 기록하며 물었습니다.

팔에 있는 멍은 언제 생긴 거니?

일주일 전이요. 큰오빠가... 손목을 잡아당겼어요.

경찰관이 조심스럽게 말했지요.

지윤아, 사진을 찍어도 될까? 증거로 필요해.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카디건을 걷어 올렸지요. 손목과 팔의 멍이 드러났습니다. 노랗게 바래진 것도 있었고, 새로 생긴 것도 있었습니다.

***

거실에서 어머니와 태현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다른 경찰관이 질문했지요.

태현 씨,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습니까?

태현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요. 그냥 가끔 혼낸 적은 있지만...

혼낸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말로요. 동생이 집안일을 제대로 안 해서 주의를 준 거죠.

어머니가 거들었습니다.

저희 집은 평범한 가정입니다. 오빠들이 동생을 때릴 리 없어요.

그때 방문이 열렸습니다. 상담원과 경찰관이 지윤과 함께 나왔지요. 경찰관이 말했습니다.

지윤 학생의 진술과 신체 증거가 있습니다. 태현 씨, 동행해주시겠습니까?

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도현과 상현도 긴장했지요. 어머니가 소리쳤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 아들이 동생을 때렸다는 거예요?

어머님, 진정하시고 경찰서에서 자세히 얘기하겠습니다.

태현은 일어났습니다. 지윤을 바라봤지요. 지윤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태현의 눈빛에는 분노와 당황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지윤아, 네가 그렇게 말했어?

지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상담원이 지윤 앞을 가로막았지요.

지금은 지윤이와 대화하실 수 없습니다.

태현은 경찰과 함께 집을 나갔습니다. 거실은 침묵에 잠겼지요. 어머니는 소파에 주저앉았습니다. 도현과 상현은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상담원이 지윤에게 말했습니다.

지윤아, 오늘 밤은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게. 괜찮겠니?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방을 챙기러 방으로 갔지요. 옷과 책을 넣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방문 앞에서 어머니가 서 있었습니다.

지윤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지윤은 어머니를 바라봤지요.

엄마...

네가... 정말 그런 일을 당했니?

지윤은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네, 엄마.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 있니. 엄마가... 엄마가 몰랐어. 미안해.

어머니는 지윤을 꼭 안았습니다. 지윤은 어머니 품에서 울었지요.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함이었습니다.

***

지윤은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임시 보호시설로 갔습니다. 작지만 깨끗한 방이었지요. 침대와 책상, 옷장이 있었습니다. 상담원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며칠 지내게 될 거야.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

선생님, 제가 잘못한 건가요?

아니야, 절대로. 지윤이는 용기를 낸 거야.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알아.

지윤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낯선 곳이었지만, 두렵지 않았지요. 오히려 평온했습니다.

***

경찰서에서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태현은 처음에는 부인했지요.

동생을 훈육한 것뿐입니다. 때린 적 없어요.

하지만 지윤의 진술과 사진 증거가 명확했습니다. 박경수 경찰관이 말했습니다.

태현 씨, 훈육과 폭력은 다릅니다. 동생 손목에 멍을 만든 건 폭력입니다.

태현은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지요.

제가... 너무 힘들었어요. 일도 힘들고, 집안 형편도 어렵고... 지윤이한테 화풀이했습니다.

그게 동생을 때려도 되는 이유가 됩니까?

아니요... 잘못했습니다.

태현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지요.

도현과 상현도 경찰서에 불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형을 따라 지윤을 괴롭힌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형이 하니까 저희도 따라했어요. 잘못이 큰 건 알아요.

도현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상현은 울먹였지요.

지윤이한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지윤은 보호시설에서 상담을 받았지요. 심리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윤아,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거 알지?

네...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지윤은 잠시 생각했습니다.

오빠들이랑... 다시 같이 살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엄마는 보고 싶어요.

엄마랑은 계속 만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지요.

학교에서 이수진 선생님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지윤을 보며 미소 지었습니다.

지윤아, 잘 지내니?

네, 선생님. 감사해요.

선생님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 용기 낸 건 지윤이야.

지윤은 선생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못 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이야기를요.

***

한 달 뒤, 법원에서 판결이 났습니다. 태현은 아동학대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지요. 도현과 상현은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습니다.

지윤은 외할머니 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함께였지요. 아버지는 따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사하는 날, 지윤은 옛집 앞에 섰습니다. 현관문을 바라봤지요. 두려움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끝났습니다.

어머니가 지윤의 손을 잡았습니다.

지윤아, 가자. 새로 시작하는 거야.

네, 엄마.

지윤은 뒤돌아 걸었습니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지요. 새로운 곳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지윤은 알았습니다.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라는 걸. 마음속 상처는 여전했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었지요.

그래도 지금은 걸을 수 있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으니까요.













5장 : 침묵을 넘어 (최종화)

외할머니 댁은 조용한 동네에 있었습니다. 낡은 단독주택이었지요. 작은 마당에는 화분들이 놓여 있었고, 대문 앞에는 할머니가 심은 장미가 피어 있었습니다.

지윤은 짐을 풀며 새 방을 둘러봤습니다. 오래된 장롱과 책상, 따뜻한 이불이 있었지요. 창문으로는 골목이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낯설었지만, 무섭지 않았습니다.

***

첫 주는 적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윤은 새 학교에 전학을 갔지요. 작은 학교였습니다.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윤을 바라봤지만, 깊이 묻지 않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지윤의 사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배려해주었지요. 지윤은 교실 뒤편에 앉아 창밖을 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점심시간, 한 여학생이 다가왔습니다.

나 민서야. 같이 밥 먹을래?

지윤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거절하는 게 익숙했지요. 하지만 민서의 눈빛은 따뜻했습니다.

응, 좋아.

두 사람은 식당으로 갔습니다. 민서는 밝게 웃으며 학교 이야기를 들려줬지요. 지윤은 조용히 듣다가 조금씩 대답했습니다.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방과 후, 지윤은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골목길은 평화로웠지요.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현관문을 열자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지윤아, 왔구나. 배고프지?

네, 할머니.

저녁 준비했다. 들어와서 손 씻어.

지윤은 할머니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부엌에서는 된장찌개 냄새가 났지요. 할머니는 말수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눈빛은 따뜻했습니다.

어머니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지윤이 다가가자 어머니가 미소 지었지요.

학교는 어땠어?

괜찮았어, 엄마.

친구는 사귀었니?

응, 민서라는 애가 말 걸었어.

어머니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지윤은 어머니 옆에 앉았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TV를 봤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편안했습니다.

***

한 달이 지났습니다. 지윤은 상담센터에 정기적으로 갔지요. 심리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요즘은 어때, 지윤아?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아요.

악몽은 여전히 꾸니?

가끔요. 근데 예전보다는 덜해요.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천천히 나아지는 거야. 시간이 필요해.

지윤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나무에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지요. 봄이었습니다.

선생님, 저... 오빠들이 미워야 하는 건가요?

상담사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꼭 미워할 필요는 없어. 네 감정이 어떻든 괜찮아. 화가 나도 되고, 미워해도 되고, 슬퍼해도 돼.

근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복잡해요.

그래도 괜찮아. 복잡한 게 자연스러운 거야.

지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뒤엉킨 감정들이 있었지요. 화, 슬픔, 그리움, 두려움이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억누르지 않아도 됐습니다.

***

어느 날, 어머니가 지윤에게 물었습니다.

지윤아, 오빠들이 면회 신청을 했는데... 만나고 싶니?

지윤은 잠시 생각했습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보고 싶었지요. 하지만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아직은...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그래,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자.

어머니는 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지윤은 어머니의 손을 느꼈지요. 따뜻했습니다.

***

두 달째, 지윤은 학교에 조금씩 적응했습니다. 민서와는 친구가 되었지요. 점심도 같이 먹고, 방과 후에는 가끔 도서관에 갔습니다.

민서는 지윤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금의 지윤을 받아들였지요. 지윤은 그게 고마웠습니다.

지윤아, 주말에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응, 좋아.

지윤은 처음으로 친구 집에 놀러 갔습니다. 민서의 부모님은 따뜻하게 맞아주었지요. 저녁을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민서의 오빠도 있었습니다. 다정하게 동생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지윤은 생각했습니다.

오빠와 동생의 관계가 이럴 수도 있구나.'

조금 슬펐지만, 동시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다른 가족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

여름이 왔습니다. 지윤은 할머니와 마당에 앉아 수박을 먹었지요.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지윤아, 많이 밝아졌구나.

그래요, 할머니?

응. 처음 왔을 때랑 다르지.

지윤은 할머니를 바라봤습니다.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로 웃고 있었지요.

할머니, 저...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이미 괜찮아지고 있잖니.

그런가요?

그럼. 천천히 가는 거야. 급할 것 없어.

할머니의 말은 짧았지만, 지윤의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급할 것 없다는 말이요. 지윤은 그동안 너무 조급했던 것 같았습니다. 빨리 나아지고 싶었고, 빨리 잊고 싶었지요.

하지만 할머니 말이 맞았습니다. 천천히 가도 괜찮았습니다.

***

가을이 왔습니다. 지윤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요. 상담사가 권했습니다. 감정을 글로 쓰면 도움이 된다고요.

처음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써 내려갔지요.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할머니와 어머니 이야기를요. 그리고 가끔은 오빠들 이야기도 썼습니다.

미움과 그리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화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지요. 지윤은 그 복잡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어느 날, 이수진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윤아, 잘 지내니?

네, 선생님. 잘 지내요.

다행이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저도 보고 싶었어요.

두 사람은 오랫동안 통화했습니다. 지윤은 새 학교 이야기를 들려줬지요. 선생님은 조용히 들어주었습니다.

지윤아, 네가 자랑스러워.

감사해요, 선생님.

아니야, 선생님이 감사해. 용기 내줘서.

전화를 끊고 지윤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낙엽이 지고 있었지요. 나무는 잎을 떨구고 있었지만, 봄이 되면 다시 잎을 피울 것입니다.

지윤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겨울이 왔습니다. 지윤은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갔지요. 겨울옷을 사러 갔습니다. 어머니가 따뜻한 패딩을 골라줬습니다.

이거 어때?

좋아요, 엄마.

두 사람은 붕어빵을 사 먹으며 걸었습니다. 어머니가 말했지요.

지윤아, 미안해. 엄마가 몰랐어.

괜찮아요, 엄마.

아니야, 괜찮지 않아. 엄마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지윤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제는 괜찮아요. 정말로요.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지윤도 눈시울이 붉어졌지요. 하지만 두 사람은 웃었습니다. 함께 있다는 게 따뜻했습니다.

***

1년이 지났습니다. 지윤은 열네 살이 되었지요. 생일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민서가 작은 파티를 열어줬습니다. 케이크에 초를 켜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윤은 소원을 빌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했지요.

앞으로도 이렇게 평온하게 살 수 있기를.'

초를 불고 케이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모두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지요. 지윤은 그 순간이 행복했습니다.

밤에 혼자 방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별이 보였지요. 지윤은 일기장을 꺼내 썼습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1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아직도 가끔 무서운 꿈을 꾸고, 가끔은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곁에 사람들이 있다. 그게 나를 지탱해준다.

지윤은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별은 빛났지요. 지윤도 그렇게 빛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천천히, 조금씩요.

***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은 끝났습니다. 지윤은 목소리를 되찾았지요.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습니다. 상처는 여전히 아물고 있었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었습니다.

하지만 지윤은 알았습니다. 걸을 수 있다는 걸.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지윤은 창문을 열었습니다. 찬 바람이 들어왔지요. 차가웠지만, 상쾌했습니다. 지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이제는 숨 쉴 수 있었습니다.

자유롭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