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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 소설 : 그는 새로운 시작이라 믿었다

by 있유노마드 2025. 10. 31.

리얼리즘 소설 : 그는 새로운 시작이라 믿었다

  14억 퇴직금 모두 날리고 3억 빚까지... 대기업 상무가 경비원 된 날

 

 

2022년 3월 25일 금요일, 서울 서초구 본사 대회의실.


김태준은 단상 위에 섰습니다. 32년 근속 기념패를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이 영광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습니다. 58세, 상무 명예퇴직. 화려한 마무리였습니다.
퇴직식이 끝나고 인사팀 직원이 봉투를 건넸습니다. 통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태준은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개인 칸에 들어가 통장을 펼쳤습니다.
1,400,000,000원'
14억. 퇴직금 9억, 명예퇴직 위로금 5억을 합친 금액이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32년의 땀과 눈물이 숫자로 환산된 순간이었습니다.
태준은 통장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새로운 시작. 그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저녁 7시, 강남의 한 일식당.
퇴직 축하 모임이었습니다. 동기들과 선배 임원 7명이 모였습니다. 술잔이 오갔습니다.
태준이, 앞으로 뭐 할 거야?
선배 하나가 물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는...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그게 현명해. 나 봐. 작년에 치킨집 했다가 3개월 만에 접었어. 임대료가 장난 아니더라고.
옆자리 동기가 끼어들었습니다.
저는 카페 했는데, 재고 관리가 지옥이었어요. 우유 버리는 게 돈 버리는 거더라고요.
웃음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쓴웃음이었습니다.
태준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르다. 이 사람들은 준비가 부족했던 거야. 나는 30년 넘게 기업 경영을 봤는데, 작은 사업 하나 못 할까?'
집으로 가는 차 안.
조수석에 앉은 수진이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선배님들 말씀 들으니까... 좀 무섭더라고요.
무서울 거 없어. 그분들은 준비 없이 덤볐으니까 실패한 거지.
그래도... 그냥 안전하게 예금하고 연금처럼 쓰면서 천천히 생각하면 안 될까요? 아직 젊잖아요, 여보.
태준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당신은 몰라. 이 돈을 그냥 묵혀두면 인플레이션에 녹아 없어져. 금리가 고작 2%인데, 물가는 5%씩 오르잖아. 지금이 기회야.
수진은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32년 결혼 생활에서 배운 게 있었습니다. 남편이 이런 어조로 말할 때는 설득이 불가능했습니다.

4월 중순, 어느 토요일.
경기도 용인의 한 골프장이었습니다. 대학 동창 박철수의 초대였습니다.
태준아, 좋은 분 소개시켜줄게. 사업하시는 분인데 굉장히 성공하셨어.
네 번째 홀을 도는 동안, 박민호가 합류했습니다.
45세쯤 되어 보였습니다. 벤츠 S클래스에서 내렸습니다. 손목에는 로렉스 데이토나. 골프백은 타이틀리스트 최신 모델이었습니다.
김태준 상무님이시죠? 많이 들었습니다. 철수 형님한테.
악수가 이어졌습니다. 박민호의 손은 부드러웠습니다. 사무직 손이었습니다.
저는 박민호라고 합니다. 부동산 개발 쪽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요즘 부동산이 힘들지 않습니까?
주거용은 힘들죠. 하지만 상업용은 다릅니다. 특히 숙박업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라운딩 내내 박민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요즘 모텔 사업이 대세입니다. 특히 고속도로 인근 프리미엄 모텔은 투자 대비 수익률이 연 15% 이상이에요. 코로나 이후 국내 여행 수요가 폭증했거든요.
태준의 귀가 솔깃했습니다.
15%요? 그 정도면 상당한데요.
네, 하지만 아무나 못 합니다. 입지 분석, 사업 계획, 자금 운용... 모든 게 완벽해야 하죠.
19번 홀을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향했습니다.
박민호가 명함을 건넸습니다. '○○개발 대표이사 박민호'. 주소는 강남구 테헤란로였습니다.
다음 주에 저희 투자설명회가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오시겠어요? 강남 그랜드힐튼호텔에서 합니다.
태준은 명함을 받았습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태준은 핸들을 잡으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연 15%. 14억을 투자하면 연 2억 1천만 원. 월 1,750만 원이었습니다.
나쁘지 않은데...'

5월 초, 집.
태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퇴직 후 두 달째였습니다. 매일이 비슷했습니다. 아침 9시에 일어나고, 신문을 읽고,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공허했습니다.
32년간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밤 10시에 돌아오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쁨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수진이 점심을 차려왔습니다.
여보, 밥 먹어요.
응.
밥을 먹으며 태준은 아내를 바라봤습니다. 수진은 56세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강남 아파트는 30평인데... 40평으로 옮기면 좋을 텐데.'
오후 3시.
태준은 책상 서랍에서 박민호의 명함을 꺼냈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박 대표님?
아, 김 상무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투자설명회... 참석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오후 2시입니다. 주소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습니다.
태준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5월의 햇살이 밝았습니다. 새로운 시작.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그날 밤, 침대.
태준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습니다. 수진은 옆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32년간 월급쟁이로 살았어. 이제는 내 사업을 해볼 때가 아닐까?'
그는 아내의 얼굴을 돌아봤습니다. 잠든 얼굴은 평화로웠습니다.
당신을 더 편하게 해줄게. 더 좋은 집에서 살게 해줄게. 해외여행도 자주 가자.'
태준은 눈을 감았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설렘이었을까요, 아니면 불안이었을까요. 그는 알 수 없었습니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왔습니다. 5월의 봄비였습니다.
태준은 몰랐습니다. 이 다짐이 가족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시작점이 될 줄은. 14억이 1년 안에 모두 사라질 줄은. 그리고 자신이 빚쟁이가 될 줄은.
봄비는 밤새 내렸습니다.





2022년 6월 7일 화요일 오후 2시.
강남 그랜드힐튼호텔 3층 컨퍼런스룸이었습니다.
태준은 입구에서 멈춰 섰습니다. 규모가 상상보다 컸습니다. 객석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대부분 50대 이상으로 보였습니다.
단상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개발 프리미엄 모텔 투자설명회'라는 문구가 빛났습니다.
김 상무님, 이쪽으로 오세요.
박민호가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정장 차림이었습니다. 네이비 수트에 흰 셔츠. 전문가처럼 보였습니다.
앞쪽 좋은 자리 마련해뒀습니다.
태준은 3열 중앙에 앉았습니다.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오후 2시 정각.
조명이 어두워지고 음악이 흘렀습니다. 박민호가 단상에 올랐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개발 대표 박민호입니다.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됐습니다.
대한민국 숙박업 시장은 연 15조 원 규모입니다. 코로나 이후 국내 여행 수요는 300%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공급은 부족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회가 있습니다.
화면에 그래프가 떴습니다. 상승 곡선이 가파랐습니다.
저희는 경부고속도로 천안 인근 2만 평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여기에 120실 규모의 프리미엄 모텔을 건설합니다.
건축 조감도가 나타났습니다. 현대적인 디자인이었습니다.
객실 수익만으로도 연 15% 이상 수익이 보장됩니다. 여기에 부대시설 수익까지 더해지면 20%도 가능합니다.
객석에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박민호가 손을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기존 투자자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시겠습니다.
한 남자가 단상에 올랐습니다. 60대 초반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작년 12월에 투자했습니다. 5억 원을 투자해서 6개월 만에 4,500만 원의 수익을 거뒀습니다. 매달 정확히 입금됩니다.
박수가 터졌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투자자가 올라왔습니다. 모두 비슷한 이야기였습니다. 투자하고 몇 개월 만에 수익을 봤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태준은 메모를 했습니다. 숫자들을 계산했습니다.
14억을 투자하면 월 1,400만 원... 나쁘지 않은데.'
프레젠테이션이 계속됐습니다.
대기업 3곳과 직원 전용 숙소 계약을 진행 중입니다. 삼성, LG, 현대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화면에 대기업 로고들이 나타났습니다.
단, 이번 투자 기회는 선착순 30명만 가능합니다. 자본금 규모 때문입니다. 빠르게 결정하셔야 합니다.
압박이 들어왔습니다. 객석이 술렁였습니다.
오후 4시, 설명회가 끝났습니다.
박민호가 태준에게 다가왔습니다.
상무님, 어떠셨습니까?
인상적이었습니다.
개별 상담 받으실 수 있습니다. 2층 VIP룸으로 오시겠습니까?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2층 VIP룸은 조용했습니다.
박민호가 차를 따라주었습니다.
상무님 같은 분이 함께 하시면 사업이 더 탄탄해질 것 같습니다. 기업 경영 경험이 있으시니까요.
과찬이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기회는 특별합니다. 토지 매입 자금이 필요해서 급하게 모집하는 겁니다. 그래서 수익률을 높게 책정한 거죠.
박민호는 계약서를 꺼냈습니다.
최소 투자 금액은 5억입니다. 하지만 상무님께는 특별히 더 좋은 조건을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8억 이상 투자하시면 월 1% 보장해드립니다. 그리고 VIP 투자자로 등록됩니다.
태준은 계약서를 넘겨봤습니다. 복잡한 법률 용어들이 빼곡했습니다.
시간을 두고 검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고민하시면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이미 20명이 계약했거든요.
압박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준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저녁 8시, 거실.
태준은 수진에게 설명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오늘 투자설명회 다녀왔어.
수진의 표정이 굳었습니다.
여보... 그거 정말 하려고?
들어보니까 괜찮더라고. 객실 수익도 안정적이고, 대기업 계약도 진행 중이래.
이거 너무 의심스러워요. 수익률이 너무 높잖아요. 연 15%라는 게 말이 돼요?
그게 기회라는 거야. 남들이 모를 때 들어가야 돈을 버는 거지.
여보, 제발 신중하게 생각해요. 이건 우리 평생 모은 돈이에요.
알아. 그래서 더 신중하게 결정하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준의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저녁, 딸 지현이 찾아왔습니다.
아빠, 엄마한테 들었어. 투자 한다고?
응, 좋은 기회가 생겼어.
아빠, 요즘 투자 사기 엄청 많다던데... 제 친구 중에 변호사 있어. 계약서 한번 검토 받아보는 게 어때?
태준은 짜증이 났습니다.
너희들은 사업을 몰라. 아빠가 30년간 회사 생활하면서 사람 보는 눈이 없겠니?
아빠, 그게 아니라...
됐어. 아빠가 알아서 할게.
지현은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 있었습니다.

6월 15일 수요일.
태준은 박민호에게 전화했습니다.
박 대표님, 투자하겠습니다.
좋은 결정이십니다! 금액은 얼마로 하시겠습니까?
8억 원으로 하겠습니다.
완벽합니다. 내일 사무실로 오시면 계약 진행하겠습니다.
다음날, 강남 테헤란로 오피스텔.
박민호의 사무실은 깔끔했습니다. 벽에는 각종 인증서와 사업자등록증이 걸려 있었습니다.
계약서입니다. 꼼꼼히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태준은 계약서를 펼쳤습니다. 20페이지가 넘었습니다.
그때 수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지금 어디야?
계약하러 왔어.
계약서는 읽어봤어? 제발 천천히 읽어보고 서명해.
알았어. 끊어.
태준은 전화를 끊었습니다. 계약서를 대충 훑어봤습니다. 복잡한 법률 용어들. 읽기가 귀찮았습니다.
뭐 별 내용 있겠어. 투자 계약서는 다 비슷비슷하지.'
그는 서명란에 이름을 썼습니다. 도장을 찍었습니다.
입금은 언제까지 하면 됩니까?
이번 주 안으로 부탁드립니다.
태준은 은행으로 향했습니다. 8억 원을 송금했습니다. 통장 잔고가 6억 3천만 원으로 줄었습니다.

7월, 8월, 9월.
매달 15일, 정확히 800만 원이 입금됐습니다.
태준은 통장을 확인할 때마다 흡족했습니다.
봐, 내가 뭐라고 했어?
수진에게 통장을 보여줬습니다.
매달 이렇게 들어와. 연 15%가 거짓말이 아니었지?
수진은 안도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수익률이 너무 좋았습니다.
9월 중순, 박민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상무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2차 투자 기회가 생겼습니다.
2차요?
네, 인근 토지를 추가로 확보하게 됐습니다. 지금 투자하시면 더 좋은 조건을 드릴 수 있습니다. 월 1.5% 수익 보장해드리겠습니다.
태준의 심장이 뛰었습니다. 월 1.5%면 6억에 900만 원. 8억과 합치면 월 1,700만 원이었습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수진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2차 투자 기회가 생겼대.
수진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여보, 이미 8억이나 넣었잖아요. 나머지는 우리 노후 자금이에요. 제발 멈춰요!
왜 그래? 지금까지 잘 됐잖아. 매달 800씩 들어오고 있잖아.
그래도 너무 위험해요. 다 넣으면 우리 남는 게 뭐예요?
당신은 기회를 모르는군.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와. 내가 가장으로서 책임질게.
여보!
수진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태준은 듣지 않았습니다.

9월 25일 월요일.
태준은 박민호에게 전화했습니다.
2차 투자하겠습니다. 6억 원 전액으로.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다음날, 계약을 마쳤습니다. 6억 원을 송금했습니다. 통장 잔고 3천만 원.
그날 저녁, 집.
수진은 식탁에 저녁을 차려놓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습니다.
화났어?
태준이 물었습니다.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2년만 기다려봐. 우리 강남에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자. 40평대로.
수진의 표정은 굳어 있었습니다.
식사는 침묵 속에서 끝났습니다.
밤 11시.
태준은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수진은 거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수진은 홀로 소파에 앉아 통장을 펼쳤습니다. 잔고 3천만 원. 32년 결혼 생활에서 처음으로 남편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4억이 3천만 원이 됐어... 이게 맞는 걸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수진은 눈을 감았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제발 남편이 옳았으면...'
거실 창밖으로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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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아침 7시.
태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습니다. 은행 앱을 켰습니다.
입금 내역이 없었습니다.
매달 15일 아침이면 800만 원이 들어왔습니다. 1차 투자금에 대한 수익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아직 처리가 안 됐나?'
태준은 다시 누웠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옆에서 수진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오후 2시, 여전히 입금이 없었습니다.
태준은 박민호에게 전화했습니다. 연결음이 길게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아, 김 상무님.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입금이 안 됐는데요.
박민호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습니다.
아, 그게... 일시적인 현금흐름 문제입니다. 대기업과의 계약 체결이 조금 늦어져서요. 이번 주 안에 처리하겠습니다.
이번 주요?
네, 걱정 마십시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지킨 적 없잖습니까?
전화가 끊겼습니다.
태준은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그래,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일주일만 기다려보자.'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입금은 없었습니다.
태준은 매일 아침 통장을 확인했습니다. 밤에도 확인했습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10월 25일, 다시 박민호에게 전화했습니다.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태준의 심장이 빨리 뛰었습니다.
수진이 물었습니다.
여보, 괜찮아?
응... 괜찮아.
거짓말이었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았습니다.
11월 15일.
2차 투자금에 대한 수익도 입금되지 않았습니다. 900만 원이 들어와야 했습니다.
태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강남 테헤란로 오피스텔로 향했습니다.
오후 3시, 건물 7층.
박민호의 사무실 앞에 섰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유리문 너머로 들여다봤습니다.
텅 비어 있었습니다.
책상도, 의자도, 서류도 없었습니다. 벽에 걸려 있던 인증서들도 사라졌습니다.
태준은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관리실을 찾았습니다.
7층 ○○개발 혹시 아십니까?
경비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3주 전에 이사 갔어요. 야밤에 짐 싸서 나가더라고요.
연락처는요?
그건 저희도 몰라요. 월세도 밀려 있대요.
태준은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벽에 기댔습니다.
설마... 설마...'

11월 20일 월요일.
태준은 서초경찰서를 찾았습니다. 민원실에 앉아 고소장을 작성했습니다.
사기 혐의로 고소하시는 거죠?
경찰관이 물었습니다.
네... 14억을 투자했는데 사업자가 사라졌습니다.
피해자가 더 있을 겁니다. 조사해보겠습니다.
일주일 후,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김태준 씨, 서에 나오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박민호에 대해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오후 2시, 경찰서 조사실.
형사가 서류를 펼쳤습니다.
박민호는 조직적 사기단의 일원입니다. 피해자가 30명이 넘습니다. 총 피해액은 약 200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태준의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이게... 무슨...
전형적인 폰지 사기입니다. 초기 투자자들에게 지급된 수익금은 신규 투자자들의 돈을 돌려막기한 겁니다.
그럼 제 돈은요?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민호는 11월 5일 태국으로 출국했습니다.
회수는요? 회수는 가능합니까?
형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법인 자산을 조사했는데 거의 없습니다. 계좌는 이미 비어 있고요.
태준은 의자에 무너져 앉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습니다.
형사가 또 다른 서류를 꺼냈습니다.
김태준 씨 명의로 대출이 실행되어 있습니다. 3억 원입니다.
네? 저는 대출받은 적 없는데요.
명의도용입니다. 계약서 작성할 때 개인정보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태준은 말을 잃었습니다.
14억을 잃은 것도 모자라 3억 원의 빚까지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
태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수진이 퇴근해서 들어왔습니다.
여보, 왜 그래? 표정이 왜 그래?
태준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여보... 미안해.
무슨 일이야? 말 좀 해봐.
사기야... 사기였어.
수진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뭐라고?
박민호가... 사기꾼이었어. 14억이... 다 날아갔어.
수진은 벽에 기댔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그럼... 우리 돈이...
없어... 다 없어졌어.
침묵이 흘렀습니다. 긴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진이 폭발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죠? 내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얼마나 말렸는데! 당신이 나를 바보 취급했잖아요!
미안해...
미안하면 다예요? 32년! 32년을 모은 돈이에요! 당신 혼자 결정해서 다 날렸잖아요!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우리 이제 어떻게 살아요? 어떻게!
태준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32년 결혼 생활에서 처음 보는 아내의 눈물이었습니다. 절규였습니다.
다음날 저녁, 가족회의.
딸 지현과 아들 준호가 집에 왔습니다.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태준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긴 침묵 끝에 지현이 입을 열었습니다.
아빠... 제가 회사 그만두고 알바라도 할게요.
안 돼. 그럴 순 없어.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준호도 말했습니다.
저도 휴학할게요. 학비 아껴야죠.
태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습니다. 가족들의 희생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12월 초.
변호사 한승우를 만났습니다. 대학 동기였습니다.
태준아, 솔직히 말할게. 회수 가능성은 10% 미만이야.
10%라도 시도해야지.
박민호는 이미 태국에 있어. 법인은 빈 껍데기고. 추적이 거의 불가능해.
한승우는 또 다른 서류를 꺼냈습니다.
명의도용 대출 3억은 어떻게든 막아야 해. 안 그러면 신용불량자 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집을 팔아야 할 것 같아.
태준은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집까지...
다른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
12월 20일.
강남 아파트를 매물로 내놓았습니다. 시세는 14억이었지만 급매로 12억에 매각했습니다.
2023년 1월 말.
아파트 잔금이 들어왔습니다. 12억 원.
명의도용 대출 3억을 갚았습니다. 남은 돈 9억.
의정부 빌라 전세 보증금 3억을 내고, 6억은 생활비로 남겨두었습니다.

2023년 2월 5일 일요일.
이사 날이었습니다.
짐은 아침부터 실어 날랐습니다. 오후 3시, 마지막 짐까지 나갔습니다.
태준은 혼자 텅 빈 아파트에 남았습니다. 거실 한가운데 섰습니다.
창문 너머로 서울 시내가 보였습니다. 15년을 산 집이었습니다.
저기, 저 모퉁이에서 지현이가 첫걸음을 뗐습니다. 5살 때였습니다. 태준이 손을 잡아주며 걸음마를 가르쳤습니다.
저 소파에서 준호가 대학 합격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빠, 붙었어!" 온 가족이 와락 껴안았습니다.
저 식탁에서 수진이 생일상을 차려줬습니다. 딸이 만든 케이크, 아들이 쓴 편지.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태준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미안해...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미안해... 미안해...
빈 거실에 울려 퍼졌습니다.
58세 남자의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아무도 닦아주지 않았습니다.
30분쯤 지났을까요. 태준은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문을 잠갔습니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1층 로비를 지나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의정부로 가는 차 안.
수진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서울이 점점 멀어졌습니다.
태준은 백미러로 뒤를 돌아봤습니다. 강남의 빌딩들이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2월의 하늘은 흐렸습니다.




2023년 3월, 의정부 빌라.
아침 7시, 태준은 눈을 떴습니다. 낮은 천장이 보였습니다. 강남 아파트의 3미터 높이 천장이 아니었습니다.
부엌에서 수저 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수진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0평 빌라는 좁았습니다. 방 두 개, 거실 하나. 가구는 중고로 샀습니다. 소파는 스프링이 삐걱거렸습니다.
여보, 밥 먹어.
수진이 불렀습니다. 목소리에 온기가 없었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된장찌개와 김치, 계란 프라이. 반찬이 줄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태준은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창밖으로 빌라 단지가 보였습니다. 낡은 건물들, 좁은 골목.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습니다.
나 오늘 구직 사이트 알아볼게.
그래요.
수진은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설거지를 시작했습니다.
태준은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구인구직 사이트를 열었습니다.
58세, 전직 대기업 임원...'
검색 결과가 거의 없었습니다.

3월 중순, 저녁.
지현이 집에 왔습니다. 표정이 밝지 않았습니다.
아빠, 저 회사 그만뒀어.
뭐?
태준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왜? 대기업인데 왜 그만둬?
스타트업으로 이직했어. 연봉은 좀 줄었지만... 괜찮아.
지현아, 너까지 그러면 안 되지.
아빠, 괜찮아요. 제 선택이에요.
지현은 봉투를 꺼냈습니다. 현금 150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거 생활비 보태요.
안 돼. 이건 네 돈이잖아.
받아요. 우리 가족이잖아요.
태준은 봉투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그만해요, 아빠. 이제 그만.
지현은 봉투를 식탁에 놓고 나갔습니다.
일주일 후, 준호가 전화했습니다.
아빠, 저 휴학했어요.
준호야...
학비 아껴야죠. 그리고 편의점 알바 시작했어요. 야간이에요.
야간? 너 몸 안 좋잖아.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려야죠.
전화를 끊고 태준은 주저앉았습니다. 자식들이 희생하고 있었습니다.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4월 초, 첫 번째 면접.
강남의 한 중소기업이었습니다. 경영지원팀장 모집이었습니다.
면접관은 30대 후반으로 보였습니다.
경력이 화려하시네요. 대기업 상무 출신이시고...
네, 32년 근속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실무자가 필요해서요. 직접 엑셀도 다루고, 현장도 뛰어야 하거든요.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탈락이었습니다.
4월 중순, 두 번째 면접.
성북구의 작은 IT회사였습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58세입니다.
저희 회사 평균 연령이 32세거든요. 분위기와 안 맞으실 것 같아서...
나이는 문제없습니다. 젊은 분들과도 잘 지냅니다.
검토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역시 탈락이었습니다.
5월까지 일곱 번의 면접을 봤습니다. 모두 떨어졌습니다.
저녁마다 태준은 편의점에 갔습니다. 소주 2병을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 혼자 마셨습니다.
여보, 술 좀 줄여요.
수진이 말했습니다.
나 좀 내버려둬.
당신 건강 걱정돼서 그래요.
건강? 이런 인생에 무슨 건강이 중요해.
수진은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밤이 되면 같은 방에 누웠지만 대화가 없었습니다. 수진은 등을 돌리고 잤습니다.
태준은 천장을 바라봤습니다.
나는 상무였어. 30년 동안 수백 명을 관리했는데... 이제는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
자존심이 무너졌습니다.

5월 어느 날 밤 2시.
태준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5층이었습니다. 아래로 주차장이 보였습니다.
난간에 손을 얹었습니다. 차가웠습니다.
이러느니 차라리...'
바람이 불었습니다. 5월의 밤바람이었습니다.
태준은 난간에 몸을 기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여보!
뒤에서 수진이 소리쳤습니다. 달려와서 태준을 와락 껴안았습니다.
뭐 하는 거예요! 뭐 하는 거냐고!
......
죽지 마요. 당신마저 없으면 나는 어떻게 해요. 제발!
수진이 울었습니다. 몸이 떨렸습니다.
태준도 무너졌습니다. 두 사람은 베란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미안해... 미안해...
나도 미안해요. 내가 너무 차갑게 대했어요. 미안해요.
두 사람 모두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32년 결혼 생활에서 함께 운 건 처음이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수진이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이제 어떻게든 살아봐요. 체면 다 버리고.
체면?
그래요. 상무였던 것, 대기업 다녔던 것, 다 잊어요. 그냥... 우리 둘이 살아남아요.
태준은 수진을 바라봤습니다. 아내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할 수 있을까?
해야죠. 우리 아이들 보고 있잖아요.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꼭 안고 잠들었습니다.

6월 초.
대학 동창 박철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태준아, 물류센터에서 단기 알바 구한대. 해볼래?
물류센터?
응. 하루 10만 원이야. 막노동이긴 한데...
태준은 망설였습니다. 상무 출신이 물류센터 알바라니.
하지만 수진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체면 다 버리고.'
할게.
그래? 내일부터 나와. 주소 보낼게.
다음날 아침 6시.
경기도 이천 물류센터였습니다. 거대한 창고였습니다.
김태준 씨죠? 여기 작업복 입으세요.
현장 관리자가 파란색 작업복을 건넸습니다.
태준은 작업복을 입었습니다. 30년 만에 입는 작업복이었습니다.
오늘은 택배 상하차 작업입니다. 트럭에서 박스 내리시면 됩니다.
일이 시작됐습니다.
박스를 들어올렸습니다. 무거웠습니다. 허리가 아팠습니다.
30년간 사무실에서만 일하던 몸이었습니다. 2시간 만에 땀이 흠뻑 났습니다.
점심시간.
동료들과 컵라면을 먹었습니다.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아저씨, 힘들죠?
한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아니...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요. 일주일 지나면 적응돼요.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후 6시, 작업이 끝났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습니다.
여보, 괜찮아?
수진이 달려왔습니다.
응... 좀 힘들긴 한데...
씻고 누워요. 내가 파스 붙여줄게.
수진은 파스를 꺼냈습니다. 태준의 허리와 어깨에 붙여줬습니다. 따뜻한 찜질팩도 올려줬습니다.
고생했어요. 내일은 쉬어요.
아니야. 돈 벌어야지.
무리하지 마요.
수진의 손길이 따뜻했습니다.
태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내가 당신한테 이런 고생을 시키려고 결혼한 게 아니었는데...
무슨 소리예요. 우리 부부잖아요.
수진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6월, 7월, 8월.
태준은 계속 일했습니다.
물류센터, 야간 경비, 주차 관리원. 무엇이든 했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습니다.
7월 말, 대학 동창회 초대장이 왔습니다.
태준은 초대장을 찢어버렸습니다.
창피해서 어떻게 가...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습니다.
창피? 일하는 게 창피한 건가? 아니지. 도망치는 게 더 창피한 거지.'

8월 말, 어느 날 새벽 4시.
강남 빌딩에서 야간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로비는 조용했습니다. 태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파란색 경비복을 입은 58세 남자. 작업모를 쓴 경비원.
내가 누구였는데...'
그 생각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 '누구'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었습니다. 상무였던 김태준은 없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냥 빚을 갚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한 명의 가장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건 아니었습니다.
일한다는 것. 땀 흘린다는 것. 가족을 지킨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새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태준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대답은 아직 몰랐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퇴근 시간이 됐습니다. 태준은 경비실을 나섰습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수진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여보, 곧 도착해. 아침 같이 먹자.
수진의 답장이 왔습니다.
응. 기다릴게.
태준은 미소 지었습니다. 작은 미소였지만 진심이었습니다.
지하철은 의정부를 향해 달렸습니다.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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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어느 화요일 밤 10시.
태준은 강남 빌딩 로비에서 야간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습니다.
한 남자가 내렸습니다. 60대 초반.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태준아?
...선배님?
정민석이었습니다. 대학 선배였습니다. 15년 만의 재회였습니다.
네가 여기서 뭐 하냐?
야간 경비... 하고 있습니다.
정민석은 아무 말 없이 태준을 바라봤습니다. 그 시선에 동정은 없었습니다.
태준아, 나랑 커피 한잔 하자. 할 얘기가 있어.
지금은 근무 중이라...
퇴근하면 연락해. 꼭.
정민석은 명함을 건넸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태준은 명함을 들여다봤습니다. '○○컨설팅 대표 정민석.'

다음날 오후 3시, 강남의 한 카페.
정민석이 커피를 건넸습니다.
태준아, 네 이야기 들었어. 퇴직금 날린 거.
...네.
미안하다. 진작 연락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제 잘못이죠.
정민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나도 15년 전에 사업 실패로 10억 날렸어.
태준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선배님이요?
응. 건설 사업에 손댔다가 망했지. 집도 날리고, 빚만 7억 남았어.
그래서...
택시 5년 몰았어.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매일.
태준은 말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배움의 시간이었어.
정민석의 눈빛이 따뜻했습니다.
대기업 다닐 때는 절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됐지. 사람이 뭔지, 돈이 뭔지, 진짜 성공이 뭔지.
지금은...
빚 다 갚고 다시 시작했어. 중소기업 컨설팅하면서 살고 있지.
정민석은 태준의 손을 잡았습니다.
태준아, 너의 30년 경험은 보물이야. 다만 그걸 잘못된 곳에 쓴 것뿐이야.
저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실패를 겪어본 사람이 더 좋은 조언자야. 완벽한 사람보다 상처받아본 사람이 더 따뜻하잖아.
정민석은 서류 하나를 꺼냈습니다.
내가 아는 중소기업들이 너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해. 시스템 구축, 프로세스 개선 같은 것들 말이야.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 내가 보장해.
태준은 서류를 받았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10월 초, 경기도 안산.
직원 50명 규모의 금속가공 공장이었습니다.
사무실도 없었습니다. 공장 한쪽 작은 방이 전부였습니다.
태준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내가 상무였는데... 이런 곳을...'
하지만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사장이 나왔습니다. 50대 중반. 작업복 차림이었습니다.
김 선생님이시죠? 정민석 대표님한테 들었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생산성이 너무 낮습니다. 도와주세요.
사장의 눈빛이 절실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태준은 3개월간 현장에 있었습니다.
생산 라인을 관찰했습니다. 직원들과 대화했습니다.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경계했습니다. "대기업 출신이 뭘 알겠어." 하지만 태준은 참았습니다.
직접 작업복을 입고 현장에 섰습니다. 직원들과 밥을 먹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김 선생님, 이 부분 좀 봐주세요.
직원들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태준은 깨달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진짜배기구나. 화려하지 않지만 진심으로 일하는구나.'
12월 말, 프로젝트가 끝났습니다.
생산성이 20% 향상됐습니다. 불량률은 15% 감소했습니다.
사장이 태준의 손을 잡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회사가 살았습니다.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2024년 1월부터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김 선생님이 정말 대기업 출신답게 체계적이더라.
입소문이 났습니다.
식품 제조업체, 물류 회사, 패키징 업체. 태준은 현장을 다녔습니다.
월 수입이 300만 원, 400만 원으로 늘었습니다. 많지는 않았지만 꾸준했습니다.
2월, 태준은 은행을 찾았습니다.
명의도용 빚 3억 원. 월 100만 원씩 갚기 시작했습니다.
30년 걸려도 갚겠다.'
각오를 다졌습니다.
3월 어느 저녁, 식탁.
지현이 말했습니다.
아빠, 요즘 표정이 밝아졌어.
그래?
응. 예전엔 항상 어두웠는데.
준호도 거들었습니다.
저도 느꼈어요. 아빠가 살아계신 것 같아요.
태준은 웃었습니다. 오랜만의 미소였습니다.
밤, 침실.
수진이 물었습니다.
여보, 요즘 행복해 보여.
응... 조금은.
다행이다.
태준은 수진의 손을 잡았습니다.
여보, 미안해. 당신 말을 들었어야 했어.
이제 됐어요.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잖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32년 결혼 생활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이었습니다.

5월, 수진이 제안했습니다.
여보, 당신 경험을 나누면 어떨까?
경험?
유튜브 같은 데. 같은 실수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잖아.
태준은 고민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심했습니다.
6월 초, 첫 영상을 올렸습니다.
퇴직금 14억을 날린 전직 대기업 임원의 고백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사기를 당했는지, 어떻게 무너졌는지,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
조회수는 127회였습니다.
하지만 댓글 하나가 달렸습니다.
당신 덕분에 사기를 피했습니다. 투자하려던 돈 멈췄어요. 감사합니다.
태준은 화면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내 실패가 누군가의 백신이 될 수 있구나.'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매주 영상을 올렸습니다. "노후 준비", "퇴직 후 주의사항", "사기 예방법".
6개월 후, 구독자가 2만 명이 됐습니다.
11월, 지자체에서 강연 요청이 왔습니다.
퇴직자 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의해주실 수 있습니까?
태준은 강단에 섰습니다. 100명의 청중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여러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저도 실패했는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악수가 이어졌습니다.
12월,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책을 내시면 어떨까요? '실패에서 배우는 노후 준비' 같은 주제로.
태준은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연말, 수입을 정리했습니다.
컨설팅, 유튜브 광고, 강연료. 월 600~700만 원이었습니다.
준호가 복학했습니다. 지현도 좋은 회사로 이직했습니다.
가족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12월 어느 날 저녁.
태준은 강연을 마치고 전철을 탔습니다.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2년 전 이맘때가 떠올랐습니다. 이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
그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습니다.
14억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습니다.
가족의 소중함. 겸손의 가치. 진정한 성공의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
의정부역에 도착했습니다.
집 앞에 섰습니다. 작은 빌라였습니다. 강남 아파트와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더 따뜻했습니다.
문을 열었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요. 어떻게 됐어?
수진이 앞치마를 두르고 나왔습니다. 저녁 냄새가 났습니다.
좋았어. 강연 끝나고 여러 분이 악수 청하러 오셨어. 자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다행이다. 자, 먹어요. 우리 강사님.
수진은 웃으며 밥그릇을 내밀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태준은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새 영상을 편집했습니다. 제목은 "실패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였습니다.
마지막 멘트를 녹음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14억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제 실패가 여러분에게는 값진 교훈이 되기를, 그리고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께는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서세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리고 지금도 걷고 있으니까요. 함께 걸어가요.
업로드 버튼을 눌렀습니다.
조회수는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컴퓨터를 끄고 거실로 나왔습니다.
수진이 소파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태준은 옆에 앉아 조용히 손을 잡았습니다.
수진은 고개를 돌려 웃어 보였습니다.
여보.
응?
고마워. 끝까지 내 곁에 있어줘서.
바보. 우리 부부잖아.
작은 빌라. 소박한 저녁. 따뜻한 손.
2년 전 강남 아파트에서 느꼈던 화려함보다 지금 이 순간이 훨씬 더 소중했습니다.
태준은 깨달았습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잃어도 남는 게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에게 남은 것은 가족이었고, 경험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2024년의 마지막 눈이었습니다.
태준은 수진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여보, 내년에는 더 좋아질 거야.
응, 그럴 거예요.
두 사람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눈은 조용히 내렸습니다. 세상을 하얗게 덮으며.
모든 상처를 덮어주듯이.